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왕과 사는 남자 후기 - 유해진이 다 가져간 영화였다

by P소소 2026. 10. 6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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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난 주말에 날씨가 꽤 쌀쌀해져서 친구랑 두꺼운 옷 챙겨입고 영화관에 갔다.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상영관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좌석이 절반은 찬 느낌이었다. 팝콘이랑 나초를 사들고 자리에 앉으면서 사실 큰 기대 없이 봤던 것 같다. 역사 영화는 워낙 좋아하는 장르라서 보긴 봤는데 예고편만 보고는 또 그 뻔한 사극이려니 했다.

 

신이 내린 팔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장항준 감독의 작품이라고 해서 한번 찾아봤는데, 이 감독님 필모를 보니까 왜 이런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. 아무튼 이번 작품인 왕과 사는 남자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영화관에서 봤을 법한 그런 화제작이었다. 나는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, 그 이유가 그냥 사실만 딱딱하게 늘어놓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보다는, 사실에 약간의 상상력과 재미 요소를 덧붙이는 방식이 내 스타일에 잘 맞기 때문이다.

 

 

간단한 줄거리와 설정 소개

이 영화는 조선 6대 국왕으로 알려진 단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.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인물인데, 영화는 그 단종을 중심에 두고 그를 지키려는 호장 엄흥도라는 인물의 시선을 함께 보여주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.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는 못 적겠지만, 왕위에서 밀려나 유배지로 가게 된 어린 왕과, 그 왕 곁을 지키는 지방 관리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전개된다. 설정 자체는 익히 알려진 역사적 배경을 따라가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선을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이 영화의 포인트였던 것 같다.

 

왕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나는 당연히 왕을 연기한 박지훈 배우님의 연기에 시선이 많이 갈 줄 알았다. 실제로 개봉 전부터 박지훈 배우의 연기가 화제가 되면서 기대감이 더 커졌던 것도 사실이다. 예고편에서 보여준 표정 연기나 눈빛만 봐도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 있었고, 그래서 영화관에 가기 전부터 왕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했었다.

 

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몰입 포인트

근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내 소감은 완전 달랐다. 단언컨대 호장 엄흥도가 이 영화의 메인처럼 느껴졌다는 거다. 아마 이 역할을 연기한 유해진 배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. 처음엔 조연 정도의 비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사람의 감정선에 자꾸 눈이 가고 마음이 쏠렸다.

 

왕의 장면에서 숙연해지긴 했는데, 정작 눈물이 터졌던 부분은 단종의 장면보다 엄흥도의 장면이었다. 어떤 장면이었냐면 구체적으로 말하긴 애매하지만, 그 사람의 표정 하나, 말 한마디에서 묻어나는 충심과 안타까움이 왕의 대사보다 더 깊게 다가왔다. 웃음이 터졌던 부분도 마찬가지였다. 왕의 장면에서는 의젓하거나 애잔한 느낌이 강했다면, 엄흥도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 특유의 능청스러움이랑 순박함이 묘하게 웃기면서도 짠했다.

 

 

유해진 배우의 존재감

나는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유해진의 영화였다고 느꼈다. 박지훈 배우의 연기가 나쁘다는 게 절대 아니고, 오히려 왕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진 무게감과 절제된 감정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. 근데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엄흥도라는 캐릭터가 워낙 입체적으로 다가와서, 상대적으로 왕의 서사가 묻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.

 

그 특유의 걸걸한 말투나 투박한 몸짓,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진심 어린 눈빛 같은 게 극장 안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 느낌이었다. 옆에 앉은 친구도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, 엄흥도가 나오는 장면마다 관객들이 숨죽이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반응이 확실히 더 컸던 것 같다. 이런 부분이 좀 신기하기도 했다. 왕 이야기를 보러 갔는데 결국 머릿속에 남는 건 왕이 아니라 그 곁을 지킨 신하였다는 게.

 

아쉬웠던 지점과 호불호

물론 다 좋았던 건 아니다. 중간중간 전개 속도가 좀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. 특히 초반부는 설정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꽤 쓰는 편이라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. 나도 중간에 한 번 살짝 집중력이 흐트러졌던 순간이 있었는데, 그게 영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호흡이 느린 편집 방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.

 

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결말을 이미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. 나는 그래도 그 과정을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궁금해서 끝까지 몰입했지만,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. 이 부분은 취향 차이가 꽤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.

 

 

극장을 나서며 든 생각

영화관을 나오면서 친구랑 한참을 엄흥도 얘기만 했다. 왕의 서사도 분명 뭉클한 부분이 있었는데, 이상하게 자꾸 그 옆을 지킨 사람 얘기만 나왔다. 집에 와서도 계속 그 장면들이 생각나서 몇 번 곱씹어봤는데, 결국 이 영화는 누가 왕이냐보다 누가 곁에 있었느냐를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였던 것 같다.

 

역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, 그리고 유해진 배우의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. 다만 빠른 전개를 기대하고 간다면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 그 점은 미리 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. 나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관람이었고, 엄흥도라는 인물을 새롭게 알게 된 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있었다고 느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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